<NOWHERE MAN>
당신은 ‘the one’입니까? ‘one of them’ 입니까?
김태정(갤러리 NUDA)
세상 모든 것들은 그 탄생에 있어 자의적일 수 없습니다. 타의에 의해 자연발생적 혹은 인공적으로 세상과 마주하게 될 뿐, 스스로가 자신의 탄생을 주도할 수는 없습니다. 역시나 사람도 예외는 아닙니다. 부모님과 상의 하에 자신의 사주팔자를 정해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무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나옵니다. 그리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겐 무언가를 결정하고, 더불어 지배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절실합니다. 아무런 선택권 없이 복불복 세상에 던져진 우리 모두가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 ‘나’ 다워 지길 바라기에 그렇습니다. 이는 어찌 보면 퐝당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타의적 탄생에 대한 당연한 보상심리입니다. 고로 개개인에게서 자유의지를 박탈하면 ‘나’는 소멸됩니다. 눈을 떠도 눈을 뜬 게 아니고, 숨을 쉬어도 숨을 쉬는 게 아닙니다. 존재하지만 존재 가치를 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나’의 의지대로, 내 맘대로 되는 일이 그닥 없습니다. 누구는 쏘~쿨하게 ‘니 꼴리는대로 살아라’ 말하지만, 세상은 지 꼴리는대로 살도록 놔두질 않습니다. 그렇게 만만한 세상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우리는 막대모양 커피믹스 끝 부분을 쥐고 설탕조절을 내 맘대로 하는 정도에도 욜라 뽕따이 즐거워라 할까요. 그까이꺼 뭐 그리 대수라고….
‘유토피아(Utopia)’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이곳에서는 귀족, 성직자, 여성의 구분 없이 모두가 노동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함께 거둔 생산물을 공동의 창고에 저장해 두고 공평히 나눠 씁니다. 말로만 떠들고 군림하며 생산물을 갈취해 큰 이득을 누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서로를 할퀴어야하는 물욕(物慾)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때문에 이곳에는 지배하려는 자도 지배당하는 자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물질적 공평함만이 유토피아에게 행복을 보장해 주진 않습니다. 유토피아가 피운 행복의 꽃은 그들의 여가시간에 있습니다. 모든 이가 노동의 현장에서 함께 땀을 흘리기에 이곳 사람들 개개인에게 부여된 노동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야근도 밤샘 작업도 필요 없습니다. 사람들은 해가 지기 전에 노동 현장에서 자리를 뜰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사람들은 학문과 예술 활동에 하루의 남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질문 하나 던집니다. 만약 유토피아의 사람들이 학문, 예술 활동을 보장받지 못했다면, 이들의 삶이 과연 행복했을까요? 즉답 드리자면, 행여나 그랬다면 이들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뿜어 낼, 스스로가 ‘나’가 되어가는 기쁨을 만끽할 수 없었을 겁니다. 뭔 말씀 인고 하니, 학문과 예술은 외부로부터 무언가를 가져와 조작하고, 지배하고 더불어 표현하며 ‘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활동입니다. 탄생부터가 타의적인 인간들이 이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나’를 실현시킬 수 있는, 그야말로 불란서 수제 초콜릿보다 더 맛 나는 그 무엇이 바로 학문과 예술이라는 겁니다. 학문과 예술이 지향하는 궁극의 형태는 아니지만,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취미라 부르는 것들을 살펴보면 대충 감이 옵니다. 사람들은 붓과 물감, 현과 울림통, 조리개와 셔터스피드, 펜과 종이, 심지어는 자신의 골반과 팔다리를 조작하고 지배하며 자신을 표현해 냅니다. 이 활동 중에 개개인은 자유의지에 의한 지배자이자 창조자가 됩니다. 그 순간만큼은 ‘one of them’이 아닌 ‘the one’이 되는 겁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나’의 주체로 ‘나’가 바로 선 사람들은 당당하게 서로와 소통하고 너그럽게 서로를 인정합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입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자아’가 올 곧게 선 사람만이 ‘타자’를 또 다른 ‘자아’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고로 ‘자기신뢰(self reliance-Ralph Waldo Emerson의 표현을 빌리자면)’로 충만한 사람들이 넘쳐난다면 서로에게 드리워진 벽은 자연스레 허물어집니다. 그리고 학문과 예술은 마른 땅 단비 같은 ‘자기신뢰’ 형성에 싱그러운 단초가 될 수 있습니다.
<NOWHERE MAN>에 등장하는 최지선의 작품은 크게 강박과 공포에 대한 이야기로 나뉩니다. 그리고 얼핏 각종 정신질환들을 현현해 나열해 놓은 재기발랄한 이미지들의 향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은 단순한 병리학적 탐닉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그 뒷맛을 곱씹어 음미하다 보면 그녀의 작품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잃어버린 나’에 대한 일그러진 갈망과 집착으로 (적어도 필자에게는) 다가옵니다.
최지선이 보여주는 ‘강박’은 타자에 투영 된 지배에 대한 집착입니다. 묵언의 순종적 타자에게 행해지는 일방적 폭력입니다. 그 타자들은 ‘나’의 폭력에 의해 닥치고 대칭을 이뤄야하고 크기 순서대로 줄을 서야하며 빼곡히 공간을 메워 나가야 합니다. 앞서 언급했듯 타의적 탄생이란 우리 모두의 한계는 자유의지를 통해 타자를 지배하면서 조금이나마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상과의 교감이 결여되면 우리는 그 지배를 통해 창조자가 될 수도, ‘나’를 표현할 수도 없게 됩니다. 되레 일방적 폭력으로 일궈낸 자신만의 질서가 언제, 어떻게, 무언가에 의해 흐트러질까 불안해하며 스스로 고립되고 더 큰 집착에 휩싸이게 됩니다.
최지선이 이야기하는 ‘공포’는 ‘강박’의 부작용(side effect)입니다. 작품 속 그녀는 소통을 거부하고 등장을 회피하며 스스로를 방어합니다. 또한 광장을 두려워하고, 침입을 경계하며 결정을 주저합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자신만의 세계’가 외부의 무언가로부터 오염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이유인 즉, 이 ‘자신만의 세계’는 자기신뢰가 결여된, 삐뚤어진 자유의지가 만들어낸 강박의 결과물이기에 그렇습니다. 고로 이 결과물을 두고 진정한 ‘나’를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앞 서 이야기 했듯, 자기신뢰를 통해 ‘나’가 ‘나’로 우뚝 설 때 타자를 인정할 수 있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 타자는 인정과 공존의 대상이 아닌 ‘자신만의 세계’를 위협하는 불안요소로 돌변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유토피아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얼마 전 한 대선 예비후보가 내건 ‘저녁이 있는 삶’이란 캐치프레이즈에 가슴 한 구석이 찌릿찌릿 저며 오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다. 몇몇에게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 있는 은혜로운 땅이겠지만, 흔하게는 되는 일 하나 없고 이리저리 치이다 멍 때리며 살다가기 안성맞춤인 칠흑 같은 땅입니다. 그렇다 보니 학문과 예술이라는 녀석들이 이 땅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게 보입니다. ‘학문’이라는 말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나는 초중고대딩들이 넘쳐나고, ‘예술이 밥 먹여주냐!’며 ‘그건 배부른 놈들의 돈 지랄’이라 여기는 국민들이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질러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까지 종횡단하며 퍼져있습니다. 학문은 좋은 점수를 따서 돈 잘 버는 직업을 갖기 위한 얄팍한 수단 정도로 여겨지고, 예술은 투자를 위한 상품이나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한 장식품 정도로 치부 됩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the one’이 아닌 ‘one of them’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모품처럼 생을 살아가는 ‘one of them’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나’가 없습니다. ‘나’를 가장한 껍데기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땅엔 ‘나’가 아닌 껍데기들만이 득실거리고 있을런지 모릅니다.
p.s 1)
글을 끝내고 보니 뭔가 허전해, 우리가 앓고 있을는지 모를 강박과 공포에 대해 두서없이 몇 글자 더 끼적여 볼까 합니다.
물질만능은 자유의지와 ‘돈’을 결부시킵니다. ‘돈’을 통해 선택권을 부여받고, 타자를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 ‘I shop therefore I am!’ 우리는 자본이 만들어낸 허상에 ‘나’를 대입하고 필요 이상의 소비를 통해 자유의지를 실천하려 합니다. 자본의 허상에 근접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불행하다 여기며,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누군가의 입맛대로 육체가 감내하기 힘들 정도의 노동력을 헌납합니다. 소비를 통해 물질을 지배하고 ‘나’다움을 얻는다 여기지만, 정작 허상만을 뒤따르다 인생 자체를 소비하기 일쑤입니다. 결국 ‘나’와 ‘물질’이라는 주객이 자본의 허상에 의해 전도되는 중독성 강한 ‘강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대한민국 부모님들의 교육열은 세계 최고입니다. 얼마나 대단한지 오바마가 다 부러워할 정도입니다. 필자가 직접 대충짐작리서치(유령)에 의뢰해 알아 본 결과 대한민국에는 맹모 뺨치는 부모님의 수가 2000만이 훌쩍 넘습니다. 이 핫 뜨거 핫 뜨건 교육열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요…. 이거 일종의 강박입니다. 한(?) 맺힌 부모의 삐뚤어진 자유의지 표출입니다. 또한 대한민국에 ‘나’가 상실되었다는 반증입니다. ‘내 새끼는 내가 젤로 잘 안다’는 핑계로 부모는 자식들의 진로에 개입합니다. 조언을 가장해 선택을 유도하고 권유하듯 결정을 강요합니다. 후에 자식이 잘되면 부모의 선견지명이고 안 되면 ‘그 때 내 말을 안 듣더니만 저 노무 자식이!’라며 뒷목을 부여잡습니다. 판검사, 의사, 교수 등등의 자식을 가진 부모들은 고개 빳빳이 들고, 어깨 쭉 펴고 다닙니다. 일단 그들의 이타적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아닌 자식을 통해 꽤나 폭력적인 자유의지를 표출했음을 증명하는, 정작 그들의 인생에 자신은 지워져버린 정말로 딱하디 딱한 케이스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최지선의 작품에 등장하는, 물건들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대칭으로 정리하고, 빼곡히 메워나가고, 수평으로 맞춰놓고 안도하는 저들의 불안하고 음울한 실상과 다를 게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자살률 세계 1위 국가입니다. 노인 자살률은 압도적 세계 1위입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기로에 선 그 분들이 누굽니까? 정치인들이 대한민국의 산업 역군이라 추켜세우며 선거철마다 알랑거리는 바로 그 분들입니다. 한창 때 그 분들은 한 번 잘 살아 보겠다며 저 밑바닥에서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그리고 자식이란 등골 브레이커에게 올인 했습니다. 이렇듯 그분들에게서 ‘나’는 지워졌습니다. 세월이 지나 그분들에게 남은 건 쇠약해진 육체와 빈곤, 세상의 풍파에 허덕이는 자식이란 강박의 산물뿐입니다.
세상이 스마트해지면서, 대한민국이 최첨단 IT강국의 위상을 얻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땅에 새로운 소통의 시대가 열렸다 여깁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교감할 수 있는 첨단의 아고라라 여깁니다. 훗! 스마트하게 SNS를 떠돌아다니는 글과 사진 7~8할은 허세로 가득합니다. 본모습을 감추고자 뒤집어쓴 가면이자 화장 떡칠입니다. 일종의 포비아입니다. 광장을 활보하는 듯 보이지만 철저히 가면 뒤에 숨어 있습니다. 자기신뢰가 결여될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자기신뢰 결여에 의한 포비아 증상 몇 가지 추가합니다!
- 자가용 10대 중 여덟아홉 대는 무채색입니다.
- 예비군들은 군복만 입으면 객기가 솟아납니다.
- ‘나’보다는 ‘우리’라는 말에 울컥합니다.
- 대의명분을 중시하며 거대담론의 조류에 편승합니다.
p.s 2)
글을 쓰고 나니,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껍데기인 냥 너무 단정적인 어조로 나불거려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흥분했나 봅니다. 분명 이 땅에도 드문드문은 진정 ‘나’다운 삶을 영위하는 분들도 있을 터인데…. ‘드문드문’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