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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한 세계를 깊이 감각하기

오정은(미술비평)

 

 

▥ 기계 상연

 

허공 높이에 버티컬이 있다. ㄱ자로 인접해 서로 닿은 접선이 있는 그것은 90도를 유지하며 양끝 확장된 방위로 서서히 움직인다. 동작 인식 센서로 보이는 회색 기기가 가까운 바닥에 놓여있다. 이는 전시장에 들어온 관람객의 존재를 버티컬의 무빙 신호로 이어지게끔 전달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수직의 선들은 관람객의 위치를 감지하고, 관람객이 전시 환경에 갓 적응하기 시작한 눈의 초점을 작품 위에 맞출 때 위이잉- 낮은 기계음을 내며 움직이는 것이다. 

 

자동으로 펼쳐지는 버티컬은 6x3m 원단 위에 출력된 어떤 이미지를 곧 보여준다. 언뜻 푸른 해저와 흑색 토양 같기도, 아무 뜻 없는 보색 무늬 추상같기도 하다. 몇 분쯤 지났을까. 버티컬은 다시 아까의 소리를 내며 역방향으로 접혀 원래의 모양대로 돌아간다. 

 

최원교의 <Waterfall>(2023). 설치 신작으로 제작된 이것은 사진 이미지를 버티컬 원단에 인쇄한 것이다. 창문 없는 허공에 드리워진 나른한 움직임이 여느 집 발코니의 그것처럼 친숙한데, 거기 있는 이미지의 작동은 기시감을 빗겨 한층 더 묘연한 감각을 띤다.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 기기로 누적 학습된, 무빙 이미지와 숏폼의 미학일까. 펼쳤다 접히며 연결되는 이미지의 무감하고 반복적인 재생이 그렇다. 그것은 여실히, 기계 장치의 순차적 공정을 은유한다. 작품 명제로 착안된 폭포수(waterfall)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작업의 흐름을 뜻하며, 실제 자동화 공정에 쓰이는 용어다. 버티컬에 출력된 이미지는 알고 보면, 상용중인 기계의 한 부분을 촬영한 후 더 크게 확대한 것이다. 기계 외장에 칠한 파란 페인트와 적갈색으로 녹슨 부위 같은 것, 특유의 요철과 깨진 망점 같은 것도 눈에 들어온다. 이는 무지개공단 지역을 관찰한 최원교 작가가 그의 디지털카메라로 포착한 부분이다.

 

장소특정성을 따라 발견된 사물의 즉물감을 표하는 이 사진을 이해하기 위해, 주변 무지개공단의 경관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부산 사하구 장림동 일대 무지개공단은 중소형 공장이 즐비한 산업단지로 바다를 매립해 만들어졌다. 1980년대 낙동강 하구둑 준공, 2000년대 홍티 포구 매립사업 진행, 기계 부품 제조 공장의 입주, 어촌이던 홍티마을의 축소, 사양 산업 쇠퇴와 마을 인구 고령화의 근현대사를 감내하고도 있다. 이곳은 또한 지방정부와 문화재단 주도로 작은 예술가 창작촌이 세워진 마을로, 그중 홍티예술창작센터에 최원교 작가가 입주해있다. 최원교는 사진을 주매체로 사용하면서 자신과 자신이 관계한 당대 지역의 특수성을 다루고, 사진의 역학을 실험해왔다. 

 

 

 

▥ 깊이 감각

 

사진을 감각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자. 카메라의 구조적 메커니즘과 필름을 현상하고 앨범에 담는 일련의 과정을 상기하면서. 그리고 그에 앞서 존재했던, 인간이 이미지를 담는 기록의 방편이던, 그림의 역사를 한편에 두고. 2010년대 이후 왕성해진 스마트폰의 보급과 동시 향상된 카메라의 기술력 또한 의식하자. 사진은 기계적인 재현 매체다. 미술사에서 전적 매체의 한계를 뛰어넘은 기술이자 원본의 아우라를 흔든 충격이었다. 망막을 대신한 조리개에 노출된 빛의 실재를 기록해 2차원 평면에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으로 기능해왔다. 오늘날 카메라는 대중에 보편화되고 일상에 스며들었으나, 사진예술의 위상은 미술관의 벽에 공고히 남아있다. 스냅사진과 스마트폰 촬영 사진, SNS가 조장한 사진의 규격과 보는 방식은 이전 미술관이 전통으로 삼았던 장르의 일반 형식에 서브컬처격 균열을 가하기도 했다. 즉 우리에게 사진은 인체의 한계와 그것의 초월 욕망을 항시 주지시키고, 전통과 현대의 이항대립으로서 곧잘 위치하는 것이다. 평면의 세계를 확장시켰고, 디지털 노마드의 ‘납작하고 평평한’ 시각성을 폭주시켰다. 우리는 사진을 어떻게 감각하고 있는가. 사진의 계속적인 역동은 우리의 지금 감각을 또한 분주하게 변화시킨다. 

 

이쯤에서 최원교의 <Waterfall>을 다시 보자. 키네틱의 기계 자체가 된 사진, 기계에서 출발해 공간의 추상적 감각으로 변주된 사진이다. 그것은 버티컬의 낱장으로 길게 잘려있고, 깨진 화소 픽셀을 여실히 드리우며 입체에서 평면으로 펼쳐진다. 비로소 한 장의 평면이 되었을 때 지시하는 대상을 드러내는 사진. 아니, 그 평면이 공간에 건축적으로 겹쳐지며, 전시장 주변에 실재하는 공장 풍경의 질감과 동류 혼합됐을 때 그것의 관계성를 알게 하는 사진이다. 시선보다 한발 앞서, 전시장에 입장하는 관람객의 주체 동작을 신호로 받아 상영되는 인터렉티브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최원교는 사진의 유물론적 감각을 변형하고 변성시키고 확대한다. 나는 그가 이번 개인전 이름에 붙인 ‘평행한 깊이(Parallel Depth)’의 뜻을 다음과 같이 유추한다. 사진의 평평하고 평행한 부피 외형, 그것을 감각하는 다양한 변화와 가능성의 깊이. 이는 작가의 10년여 작업을 연대기적으로 바라보았을 때도 동일하게 부상하는 주제 의식이다. 여기서 ‘깊이’는 회화의 환영감처럼 원근법을 적용한 재현 술의 충실함으로 도달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최원교는 이미지 대상의 거리감을 희석하고, 지금 여기의 현전으로 감각하게끔 사진을 앞으로 끌어당겨 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무지개공단의 면면을 사진으로 찍고 조각한 올해 신작이자, 같은 규칙성으로 지난해 다른 장소에서부터 시작된 <Factory>와 <Figure>연작을 보자.

 

 

 

▥ 로컬 조각

 

같은 사진을 수백 장의 필름지에 인쇄하고 모퉁이를 풀로 붙여 각이 맞도록 제본한 뒤, 내부에 문양을 내 예리한 칼로 한 장 한 장 파낸다. 전체 사진은 볼륨감이 있고, 그 문양 내부는 1mm 이하 간격 저하등고선의 형태로 오목하게 들어가 있다. 사진은 강판 패널로 둘러싼 공장의 외벽이나 파이프 및 배선이 기하학적으로 엉킨 기계실 벽 따위를 비춘다. 잘린 종이의 레이어는 이들 배경의 공학적인 선에 교차된다. <Waterfall>의 버티컬 수직선에 조형적으로 함께 공명하던 것이기도 하다. 이들 <Factory>는 전시장에서 좌대 위에 올라가 있다. 사진의 납작함을 조각의 입체로 구현하고, 원본 사진 한 장을 거푸집 삼아 수공예적 행위로 완성시킨 이미지다. 가촉적인 사진이자 조각된 사물, 건축물의 미니어처 모형에 가까워져 있다.  

 

<Figure>는 <Factory>에 비해 평면적으로 액자의 형태를 고수하지만, 낱장의 사진을 탈하기는 마찬가지다. 공장이 즐비한 건축적 풍경과 산업시설 및 기계 표면을 포착한 이 연작은 여러 개의 촬영본에서 작가가 오려내고 부착한 콜라주 이미지의 조합인데, 손으로 잡고 배열한 아날로그식 만들기는 여기서도 이어졌다. 최원교는 디지털 공정의 비(非)물질화를 손의 감각을 경유한 물리적 실체로 변환하고자 했다고 작가노트에 밝히고 있다. 작가가 표하는 실체성은 작업이 진행된 장소의 특이성을 부각하고, 줌-인된 이미지의 미시적이고 광학적인 상을 강조하고, 서로 다른 배율과 모양으로 조정된 이미지를 변화적으로 제시하며, 앞뒤의 순서 및 입체성이 있는 사진으로 드러나게 하는 특성을 지닌다. 기계로 멀어져 갔던 인간 소외의 감흥은 작가가 직접 손으로 매만진 공정으로써 일부 휘발된다. 

 

이제 최원교의 작업에서 사진은 원래의 매체 특성 정의로부터 이탈되어 자신의 새로움을 말하려고 한다. 이것이 매체 단위 실험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최원교 작업을 사회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근거는 그들 방법론이 지역의 맥락과 구체적 현시로부터 나온다는 점이다. 작가는 작가노트의 또 다른 문장으로 이렇게 적은 바 있다. ‘이 작업은 부산의 공단 지역을 관찰하고 촬영하고 수집된 이미지들을 재구성하였다. (...) 변형된 사진 이미지는 기계적 움직임과 과학적 합리성, 반복과 규격성이라는 공단 지역의 집단적 특성을 담고 있다.’

 

작가의 시간을 역순으로 돌려, 초기작 <My Sweet Home>(2012~2018)를 본다. 이것은 이번 전시에 출품된 것은 아니지만, 최원교의 작업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시작이 되는 작품이다. 당시 고향 부산을 떠나 서울로 상경해 원룸 생활을 했던 작가 자신의 자전적 기술이 근간이 된 사진, 자기 자신에서 주변 타자로 옮겨가 증언자로서 재현한 원룸 사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보처럼 매끈한 사진 속 공간은 이쪽 관람객이 위치한 전면을 따라 작은 소품과 가구로 배치되어 있고, 마치 분리된 무대를 대하듯 연극성을 띤다. 반어적인 제목을 사용한 이 연작에서 작가는 삭막하고 꽉 막힌 도시 규범 속 고립되고 불완전한 개인의 심리를 드러내고자 했다. 런던 유학 시절의 작업 <Hands>(2015)는 도심의 불결한 시설물과 그로 인해 생긴 강박 증상을 시각화한 것으로 이때의 사진은 무결한 흰 배경 앞에 오직 손의 강박적 동작만이 반복 촬영되어 있다. 제주도에서의 사진 연작 <We don't belong here>(2020)은 인기척 없는 폐건물과 날것대로의 자연물이 수상한 기운과 응시 대상으로서 담겨 있고, 작가가 울산 북구 예술창작소에 머물렀던 전년도의 <Figure>와 <Factory>는 울산의 대규모 공업단지를 기계적으로 담았다. 울산의 작업에서부터 사진의 역학과 산업도시의 시각 언어가 상호 매칭되는 면모를 보였고, 부산에서 연이어 증폭되었다. 폭포수 같은 기계의 순작동, 편의를 환기하는 동시에, 그것의 오작동으로서 발생하는 도시화의 문제를 예증한다. 나는 그런 ‘평행한 깊이’에 들어가는 작가의 조각적 사진술을 계속 지켜보려고 한다. 때로는 즉결의 사진으로, 어느 때에는 건축으로 부상하며, 지역의 관념어로 깊이 관계하는 그것을 말이다. 매체에서 컨텍스트로, 미시에서 주변으로 확장해가는 그 깊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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