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미지
-확신의 의심을 환영하며,
치명적 오류는 내가 무엇을 잘 알고 있다는 확신에서 시작된다. 이에 파생되어 속단과 단언은 복잡한 현시대를 살아가는데 효율적인 개인 방어기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도 한다. 도시에서의 모든 문명적 기술적 혜택을 누리며 살아왔다 하여 도시를 잘 아는 사람일까.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에 속하게 되는 우리는, 사회에 대해 얼마나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나. 최지선 작가의 <이미지의미지>는 사진이라는 매체의 형식과 인식에 있어서 오랜 시간 굳혀진 확신의 인지체계를 유연하게 한다. 습관화된 섣부른 확신의 사고를 잠시 멈추고, 예술 활동의 가치에 대한 창작자의 소명과도 같은 근원적 질문에서부터 사진이라는 매체의 탐구로 확장되는 작가의 작업을 통해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을 환영해 보자.
자르고 매달리고, 오리고 겹겹이 쌓이고. 최지선 작가의 작업은 익히 접해오던 사진이라는 평면 매체의 스테레오타입적 예상에 반복적인 변주를 가한다. 특정한 매체가 선례들을 통해 굳혀지며 가지게 되는 인상은 그 형질의 전복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큰 집중과 효과를 만들어내는 이점을 가지기도 한다. 재현 과정에서 무엇을 실제의 현실로 남길 것인가에 대한 사진적 행위를 넘어 물리적 개입을 더하는 작가적 행위는 이미지 대상 그대로의 이해를 혼란시키며 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성하게 된다. 작업의 전반은 울산에서 촬영되었다. 지리적 이점과 도시계획으로 공업단지의 활성화를 이루어낸 울산이라는 도시가 주는 이미지는 꽤나 독보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업과 노동의 연상은 작가의 반복성과도 닮아있다. 작가의 노동집약적 행위의 결과물로서 도출되는 형상은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노동성에 집중되며, 층위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인지 순서는 보다 다층적인 감상을 이끌어낸다. 한데 이 수고로운 노동은 무엇으로 귀결되는 것일까. ‘공업의 활성’, ’기술의 강세’라는 키워드에 작품 속 작가의 숱한 노동을 비견해본다. 그러고는 이내 굴곡진 자름새에 인력의 흔적을 발견한다. 세상만사 가치 평가에 순위를 매기기 급급할 때 기계적 이성의 논리는 편리함을 선사한다. 그리하여 가치를 숫자가 대신하며 진심을 시각적 노동에서의 기여도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사람만의 문법이 있다. 찰리 채플린의 1989년작 영화<모던 타임스>가 명작인 까닭은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표준화된 기계 시스템의 시대 반영적 묘사를 해냈기 때문만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더욱이 두드러지는 인간의 비합리성과 실수가 만들어내는 삶의 가능성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작가의 기계적 반복 노동의 산물인 층위를 볼수록 두드러지는, 단위로 측정 불가한 인간의 가치성에 대해 다시금 긍정의 마음을 다잡아본다.
순간을 포착한 이미지 작업인 <Pink tree>, <mountain>, <Island>등, 도시의 요소와 상충되는 자연의 요소와의 만남으로 빚어지는 혼란은 작업의 제목을 통해 이를 잠재우며 시각을 명료하게 한다. 찰나의 교차로 포착되는 이미지의 새로운 의미 확장은 서두에서 언급한 치명적 오류의 발단을 무력화하는데 일조한다. 확신은 가능성이라는 틈에 자리 주기를 인색해하기 때문이다. 최지선 작가의 작업이 중요한 논지를 가진다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틈을 벌리고자 하는 행위. 우리가 매일 마주하고 있는 도시가 느낄 수 있는 도시의 전부일까. 아니다. 이는 극히 부분적이며 작업에 포착된 순간들이 그러하듯 늘 새로운 인상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가치는 마땅히 숫자로의 환산이 가능하며 노동의 분량이 증거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사람의 문법으로 이해되어지는 서로는 수치화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글의 말미에 다다르며, 다시금 작가의 작업들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얕은 확신이 만들어낸 오류들이 만연한 세태 속, 보이지 않는 가치에 더욱 큰 값을 매기는-묵묵히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안은 담담한 존재는 위로를 준다. 작업이 그러했다. 그리고 받은 위로를 마땅히 작가에게도 건네고 싶다.
이가은 (523KunstDoc 큐레이터)